꽃은 저마다 피는 시기가 다 다르다.
개나리는 개나리대로, 동백은 동백대로
자기가 피어야 하는 계절이 따로 있다.
모두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가 피어난다.

늦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마라.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괜찮다.

현재의 노력은 성공의 거름이 되어
훗날 누구보다 예쁘게 피어날 것이다.

잊지 말라.
다소 늦더라도 그대는 반드시 예쁜 꽃을 피울 사람이다.

-한번 뿐인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사람 일이란 그렇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무모하고 도전적이다.

나를 시험하자.
이 수십억 인구 중 그저 1을 보태는 나를 증명하자.
오롯이 나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나에게 던져지는 주변의 그 수많은 말에 대해 증명 하는 방법은,
그 수많은 말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다.

버티는 것. 끝까지 버티는 것.
인생이라는 길 끝에 너의 말이 있을지 나의 말이 있을지
버티다 보면 알게 될 일이다.

그러니 끝까지 버텨내시길.

– 나는 네가 올 때마다 주워 간다-

 

 

내 꽃은 언제 피울지 모르겠고,,,

버티는게 말처럼 쉽지는 않으세상입니다

 

67년을 꽃을 피우기위해 노력했고,,,

버텨왔는데,,,

아직 꽃봉오리도 안생긴 느낌입니다 ㅠㅠ

 

그래도 버텨야 겠죠,,

그게 인생이니까요,,

 

늘 행복하세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많이 가질수록 가난해진다.

“그럼 별을 소유하면 아저씨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

“부자가 되지.” “그럼 부자가 되는 건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

“다른 별들을 사는데 소용되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네 번째 별에서 사업가를 만났다. 어린 왕자는 그가 별을 소유하려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별을 소유하면 아저씨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부자가 되지”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부자가 되는 건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

그가 대답했다. “다른 별들을 사는데 소용되지.”

사업가는 현대자본주의가 만든 인간상이다.

자본주의는 계속 자본을 증식해야 유지가 되는 사회체제다.

이런 사회 시스템에 길들어진 인간이 사업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사업가다.

계속 소유하려 한다. 왜?

그게 잘 사는 거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소유를 보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소유를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다.

이런 우리들의 삶을 우리 내면의 아이, 어린 왕자의 눈으로 보자.

마음을 고요히 하면 어린 왕자가 깨어난다.

자신을 포함해 다들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왜 저렇게 소유에 목을 매고 사는 거야?’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는 다 불행하다. 왜 그럴까?

고대의 현자 맹자에게서 지혜를 구해보자.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 리 길을 멀다고 하지 않고 찾아주시니 장차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왕은 어째서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로지 인의(仁義)가 중요할 뿐입니다.

왕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고 궁리하면

대부는 ‘어떻게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를 궁리하고

선비와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한 몸을 이롭게 할까’를 궁리하게 됩니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만을 탐하다 보면 나라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이치다.

이익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이익이 오지 않는 게 천지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삼라만상은 이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운행된다.

이 천지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다.
본성(本性)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내면의 본성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야 한다.

 

본성에는 맹자가 말하는 인의가 있다.
인(仁)은 사랑의 마음이고,

의(義)는 옳은 것을 아는 마음이다.

 

양혜왕이 인의에 따라 정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나라 전체에 이익이 오게 된다.

나라는 점차 부강해질 것이다. 강국이 되어 갈 것이다.

인의를 행하게 되면 이익이 오지만,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이익이 사라지는 게 이 세상의 냉혹한 이치다.

 

 

개인도 그렇다.

지금처럼 맹목적으로 소유를 향해 돌진하게 되면,

세월이 지날수록 가진 것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소유가 삶의 목적이 된 이 세상을 보자.

다들 많이 갖고 있는가? 항상 목이 마르고, 외롭지 않은가?

 

소유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온 현대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갖고 있는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행복이 얼마만큼 있는가?

 

인간도 아주 오래전 원시 시절에는 온몸으로 ‘거대한 우주를 끌며’ 살았다.
그러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점차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져가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이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by. 고석근 https://brunch.co.kr/@b01b7070c4be481/760

 

 

날마다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날마다 가난해지시지 말고,,

날마다 부자가 되세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김형석 교수의 기도

 



내 세월 다하는 날
슬픔 없이 가게 하여 주소서

초대 없이 온 이 세상
정주고 받으며
더불어 살다가
귀천(歸天)의 그 날은
모두 다 버리고
빈 손과 빈 마음으로
떠나기를 약속하고 왔나니
내 시간 멈추거든
그림자 사라지듯
그렇게 가게 하여 주소서

 



한 세상 한 세월
사랑하고 즐겁고 괴로웠던 생애였으니
이 세상 모든 인연들과 맺어 온
그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이
허락 없이 떠나는
그 날의 외로움으로
슬프게 지워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다만
어제 밤 잠자리에 들 듯
그렇게 가고 보내는 이별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울러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슬픔과 외로움을 잊고
이 세상의 삶을 더욱 알고 깨달아 굳건히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하여 주소서

아름다운 이 세상
마지막 소망을
아름답게 이루고
아름답게 떠나가게 하여 주소서...

 

아멘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기념인물 다산 정약용 先生

유네스코는 2012년 세계기념 인물로 네 사람 (루소, 헤르만헤세, 드뷔시, 정약용)을 선정하였는데,

그중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등재된 바 있습니다.

 



실학에 꿈을 키운 다산(茶山) 정약용 (丁若鏞,  1762~1836년) 선생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에 대해서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5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 (實學思想)을 펼친 실사구시 철학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초시는 1000명,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조선왕조 최고의 대학자였던 정조는

다산의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정조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다산은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 (風雲之會),

즉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습니다.

다산이 계속 장원을 하니 감탄하여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정책에 대해 물어보았고,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6년 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첫날 시(詩)를 지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 속에 다짐하였습니다.

이 다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3세에 암행어사로 경기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하였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 생각하며 결심하였습니다.

정조는 다산이 30세 때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수원 화성 건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산은 설계를 하면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거중기 11대를 투입해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였으니 정조가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다산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정권을 집권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1801년 11월 하순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정약전, 정약용 두 형제는 기약 없는 눈물의 생이별을 했습니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습니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동문 밖 주막에 들려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는 모르겠는데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말씀해 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소.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다산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다산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천 리 길을 가족과 헤어져온 사람으로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았고,

유배지 강진 고을에서도 홍안애명 (鴻雁哀鳴)의 슬픈 현실을 지켜 보았습니다.

다산은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다산은 어리고 순한 양들이 제 목소리를 다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리며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서 목민심서 (牧民心書) 48권 16책,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는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저술한 경세유표 (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

경세유표의 원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 "미완성작" 등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국가의 모든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 안대로 실행하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적(性理學的) 해석과 관념의 문제점도 지적 실학적(實學的)으로 바꾸었고

실천이 없는 철학과 사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선생은 늘 "모든 과학의 원리는 수학에 근본이 있다."고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교과서를 개편하여 백성들이 수학을 배워야 나라가 부흥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식인 학연, 학유 두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며,

편지를 통해 수없이 효제(孝悌)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언젠가 폐족을 면하는 길은 책을 읽고 독서하는 것 밖에 없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사람은 책을 읽을 줄 알고 짐승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벼슬을 했어도 재산이 없어 물려줄 것이 없는데 야박하다고 서운해 하지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부적 두 글자를 물려줄테니 항상 지니고 다녀라. 그것은 바로 근검(勤儉)이다."

 


올해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신 260주년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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