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가스보일러만 켜도 방안에 금세 온기가 들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취약계층 어르신들은
여전히 난방이 어려워 겨울이 두렵습니다.
게다가 얇은 합판으로 벽을 만든 임시 보금자리는
찬기가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오기에...
어르신들의 한숨은 짙어져만 갑니다.

 



서울 외곽의 어느 비닐하우스 마을.
이곳에 살고 계시는 김창수(가명, 82세) 할아버지는
도시가스를 놓을 형편은 되지 않고,
난방비는 부담이 돼서 저렴한 난방 수단인
연탄을 땝니다.

낮에는 리어카를 끌면서 폐지를 줍는데,
수입이 몇 푼 되지 않습니다.
어르신은 곧 들이닥칠 겨울이 걱정입니다.
올해는 연탄을 얼마나 지원받을 수 있을지...
또 지난해처럼 중간에 떨어져서
추운 새벽을 맞으면 어쩌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속에
한숨이 짙어집니다.

 



"연탄 준다고 하면 너무 고맙지요,
연탄값이 갈수록 비싸져서 우리 같은 경우에는
추울 때만 연탄 때지, 평소엔 그냥 안 때고 지내요.
겨울에는 온몸이 시려서 도저히 잠을 못 자니까...
전기장판에 솜이불이라도 덮고 있어요."

할아버지의 소원은 할머니와 함께
아랫목에서 올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겨울철 한 가구당 연탄 사용량은 평균 850장.
요즘엔 연탄을 때는 가정이 줄어들고,
공장도 문을 닫는 추세로 배달 가격 또한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쪽방촌이나 비닐하우스, 산동네 등에 사시는
취약계층 어르신들의 연탄 사용이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어르신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도 추위는 이듬해 3월까지도
계속 이어집니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긴 겨울을 버티어야 하는 취약계층 어르신들을 위해
텅 빈 연탄 창고에 따뜻한 사랑을
가득 채워주세요.

 



커피 한 잔 가격이면 연탄 3장을
한 가정에 선물할 수 있습니다.
연탄 한 장이 더 따뜻한 하루를 만듭니다.
여러분의 작은 사랑이 우리 이웃들의
겨울을 한결 포근하게 만듭니다.


= '연탄 한 장의 기적' 후원 계좌 =
우리은행 : 1005-603-666664
(사단법인 따뜻한 하루)


 



따뜻한 하루에서는 1월 20일, 27일
연탄 자원봉사자 신청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많은 신청 부탁드립니다.

 

오늘 포스팅은 사단법인 따듯한 하루의 연탄한장의 기적 이라는

행사를 돕는 포스팅을 올립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실수 있거나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은 함께하시면 좋으실것 같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울 때

한 엄마에게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짜리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죽은 남편이 가해자로 몰려 그들은 맨몸으로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가까스로 살 곳을 마련하고, 변변찮은 이불과 옷 몇 가지로 셋이 함께 살았습니다.

엄마는 아침 6시에 집을 떠나 빌딩 청소를 하고, 낮에는 학교 급식을 돕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살았습니다.

집안일은 초등학교 3학년 맏이가 맡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냄비에 콩을 잔뜩 안쳐 놓고 집을 나서며 메모를 써 놓았습니다.
"영호야, 냄비에 콩을 안쳐 놓았으니, 이것을 조려 저녁 반찬으로 해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다."   -엄마가

 



그날 하루 종일 시달려 지친 엄마는

오늘은 꼭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면제를 사들고 돌아왔습니다.

두 아이는 이불을 덮고 나란히 잠들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엄마에게!"라고 쓰인 편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 엄마는 수면제를 버리고 맏이가 만든 콩자반을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먹었습니다.

이런 편지였습니다.
"엄마! 오늘 엄마 말대로 콩이 물러졌을 때 간장을 부었는데

동생이 짜서 못 먹겠다고 투정해서 한 대 때렸더니 울다가 잠들었어요.

열심히 콩을 삶았는데... 엄마! 용서해주세요.

내일은 나가시기 전에 저를 꼭 깨워 콩 삶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엄마! 피곤하시지요? 꼭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엄마 고생하시는 것 저희도 다 알아요. 먼저 잘게요"  

 



'주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알아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 합니다.

알아달라고 하면 관계가 멀어지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관계가 깊어집니다.

알아달라고 하면 섭섭함을 느끼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넉넉함을 느낍니다.

행복은

'알아달라는 삶'에는 없고 '알아주는 삶'에는 가득합니다.

우리가 산에 가면 가끔 한적한 곳에 혼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을 봅니다.

그 꽃은 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아름답게 향기를 날리며 곱게 피어 있습니다.

미모 경쟁도 하지 않고, 향기 경쟁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 아름답게 삽니다.

삶은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각자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전도서 3 : 11 )

 

 

사랑은 아무리 힘든일도 극복할수 있게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올해까지는 이렇게 포스팅만 하고,,,

내년부터는 이웃과 교제하면서 행복한 불로거가 되겠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스승  (2) 2024.01.11
연탄한장의 기적  (2) 2023.12.23
각자의 삶, 각자의 인생을 사랑하자  (2) 2023.12.16
마이웨이 (I did it my way)  (2) 2023.12.08
모든 꽃이 봄에 피어나지는 않는다  (1) 2023.12.06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ㅡ엄상익 변호사의 변ㅡ 

 



사법연수원 다니던 시절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성이 옆자리 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에서 푸른빛이 튀어 나올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판사가 됐다. 

어느 날 판사실을 찾아 간 내게 그녀가 한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양다리만 성하다면 차라리 파출부나 창녀가 돼도 좋겠다' 고~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다고 했다. 
걷는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의 영역이었으며 행복의 기본 이었다. 

뇌성마비로 육십 평생을 누워서 지낸 여성을 변론한 적이 있다.

몸은 마비됐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정신도 또렷 했다.

그녀는 크로스비 여사 같이
전 기독교인의 사랑을 받는 찬송가를 만든 시인 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자각 하고서부터 자살 하고 싶어도 

혼자서 죽을 능력이 없어 살아 왔다고 내게 고백했다. 

약국으로 걸어갈 수도 없고 강물에 빠져 죽을 수도 없었 다고 했다.
혼자 방안에서 일어나 목을 매달 수도 없었다. 그녀는 말도 못했다.

한마디 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한다 그래도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앉을 수만 있어도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와서 그녀를 돌 보던 여자는 

“혼자 화장실 을 가고 목욕할 수 있는 게 큰복 인 줄을 전에는 몰랐다” 고 내게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영화감독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의사들은 귀의 기능 에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됐다.

그를 만났을 때 공허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는 내 입술을 보았다.

내가 말 하는 의미를 알아채기위해서 였다.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은 내게 남편이 다시 들을 수만 있다 면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겠 다고 했다. 

내가 고교 시절 혜성같이 나타난 맹인 가수가 있었다.

가요제에서 여러 번 수상 경력이 있는 타고난 뮤지션 이었다.

나중에 그는 맹인 이라대중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을 거부당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바닷가 피아노가 놓인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았을 것 같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편지로 소통을 했던 적이 있다.

그는 암흑의 절벽에 매달려서라도 살 수만 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나 귀중 한 것이다. 

돈 많이 줄테니 내 대신 죽어 달라면 응하는 사람이 있을 까?

아마 없을 것이다.

산 같은 재산도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도 사람의 생명보다는 가치가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일자리가 없다고, 늙었다고, 외롭다고 불평 하고있다. 
보고 듣고 걸으면서 존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줄 알아야 하지 않을 까? 

우리는 날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곧 죽어가는 누군가의 애잔한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그들이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는삶을 날마다 살고 있다.

누군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 들이 내게는 날마다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는것~. 

그런데도 나는 그걸 모르고 불평하고 있다.

한쪽 시력을 잃고 나서야 건강한 눈으로 책을 읽던 그 시절이 행복 이라는 걸 깨달 았다.

놀랍게도 나는 누군가 의 간절한 소원들을 젊어서부터 다 이루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 인지 날마다 깨닫는다면

우리 들의 하루는 기적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각자의 삶, 각자의 인생, 자신을 사랑 해야겠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길은 사람들이 정말 자주 쓰는 흔한 말입니다.  

나는 이상하게 이 한 글자 단어(單語)가 오래 전부터 참 좋았습니다.

 



그 어감이 입에 착 감깁니다.  

긴 세월(歲月) 참 친구(親舊)처럼 다정(多情)하게 긴 여운(餘韻)을 줍니다.

‘에움길’
이 뜻을 모르는 이도 많을 거 같습니다. ‘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 이라는 뜻입니다.
둘레를 빙 '둘러싸다’ 는 동사(動詞) ‘에우다’에서 나왔습니다.

지름길은 질러 가서 가까운 길이고,
에움길은 에둘러 가서 먼 길입니다.

‘길’은 순수(純粹) 우리말입니다.
한자(漢字)를  쓰기 전부터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라(新羅) 향가(鄕歌)에도 나옵니다. 길을 칭하는 말들은 거개가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길 이름에는 질러가거나 넓은 길보다  돌아가거나 좁고 험한 길에 붙은 이름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인생사(人生事)처럼 말입니다.

 



집 뒤편의 뒤안길,
마을의 좁은 골목 길을 뜻하는 고샅(길),
꼬불꼬불한 논두렁 위로 난 '논틀길',
거칠고 잡풀이 무성(茂盛)한 '푸서릿길',
좁고 호젓한 '오솔길',
휘어진 '후밋길',
낮은 산비탈 기슭에 난 '자드락길'
돌이 많이 깔린 '돌서더릿길'이나 '돌너덜길',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자욱길',
강가나 바닷가 벼랑의 험한  '벼룻길'.

'숫눈길’을 아시나요?
눈이 소복이 내린 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대의 첫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입니다.

 



‘길’이란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참 문학적(文學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이고 사유적입니다.
‘도로(道路)’나 ‘거리(距離)’가 주는 어감(語感)과는 완전(完全) 다릅니다.

‘길’은 단순(單純)히 사람들이 밟고 지나 다니는 것만을 의미(意味)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이 없다” 거나
“내 갈 길을 가야겠다”라는 표현(表現)에서 보듯 길은 삶에서의 방법이거나 삶 그 자체입니다.

영어 ‘way’도
‘street’와 달리 같은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서양(西洋) 사람들도 길에서 인생을 연상하는구나 싶어 신기(新奇)했습니다.

불교(佛敎)나 유교(儒敎), 도교(道敎) 등 동양(東洋) 사상(思想)에서의 공통적(共通的) 이념(理念)도  

'도(道)'"라고 부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평생(平生) 길 위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헤매고, 누군가는 잘못된 길로 가고, 누구는 한 길을 묵묵히 갑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탄탄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습니다.

세상(世上)에  같은 길은  없습니다.  

나만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프랭크 시내트라에게는 “Yes, it was my way” 였고 “I did it my way” 였습니다.

미국인(美國人)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詩人) 로버트 프로스트는

명시 ‘가지 않은 길’에서 이렇게 술회(述懷)했습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길은 목적지(目的地)에 가기 위해서도 존재(存在)하지만 떠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길을 간다’ 라는 말보다 ‘ 길을 떠난다’ 는 말은 왠지 낭만적(浪漫的)이거나 애잔하거나 결연합니다.

결국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이거나, 고행(苦行)의 길이거나, 득도(得道)의 길이거나,

산티아고 길이거나, 바이칼 호수(湖水)의 자작나무 숲길이거나, 동네 둘레길이거나 ~~

우리네 인생이 곧 길이요,  우리의 발이
삶입니다.  결국은 ‘마이 웨이’를 가는 겁니다.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에움길로 돌아서 갈 것인가.

인생길은 결국은 속도(速度)와 방향(方向)의 문제(問題)입니다.
지름길로 가면 일찍 이루겠지만'

그만큼 삶에서 누락(漏落)되고 생략(省略)되는 게 많을 것입니다.

에움길로 가면 늦지만 많이 볼 것입니다.
꽃구경도 하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듣고, 동반자와 대화(對話)도 나눌 것입니다 .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사랑은 차표(車票) 한 장으로 쉽게 가는 지름길이 아니고,

수만 갈래의 에움길을 돌고 돌아서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길을 저벅저벅 걸어가야겠지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Recent posts